반미주의에 관한 석사 논문을 쓰면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닫거나 느꼈습니다.
첫째는 한국에서의 반미운동이 1980년대에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한국은 1970년대까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거나, 세계에서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외쳐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고 주장했습니다.
1940년대에 이어 1950-60년대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미국의 한 외교관 출신 학자는 한국에서의 반미는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전까지 “나무 속의 생선처럼 희귀했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기도 했고요.
한미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혈맹 관계로 묘사됩니다. 피로 맺어진 동맹 관계라는 뜻이지요.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천사 같은 나라”나 “은인의 나라”로 간주되어 왔으니 이름 그대로 정말 ‘아름다운 나라 (美國)’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는 반미감정이 1980년대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반미감정은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1945년부터 표출되었거든요. 한국은 1980년 이전에도 “반미의 무풍지대”가 아니었고, 언제든지 반미의 미풍은 있었으며 때로는 강풍이나 돌풍도 불었습니다. 그러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반미의 폭풍 또는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지요.
둘째는 제 자신이 서서히 ‘친미’에서 ‘반미’ 쪽으로 기울어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주장에 “맞아,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우가 많아지더군요.
그러면서도 미국 사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버리기 어려웠습니다. 저에겐 정말 ‘기회의 땅’이었거든요. 앞에서 얘기했듯, 한국에서 돈 한 푼 가져가지 않고도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었으며, ‘말썽 많을 듯한’ 두 아이를 병원비도 없이 잘 낳고 기를 수 있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친미주의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미주의자였던 셈이랄까요? 제 마음이 이렇게 이중적이기에 앞서 미국 자체가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그 무렵 멕시코의 작가 출신 외교관이 아주 멋들어지게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석사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라틴 아메리카의 유명한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저희 학교를 방문해 특별강연을 했는데,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음과 같은 얘기엔 귀가 번쩍 열리더군요.
“미국이 국내에서는 민주주의지만, 해외에서는 제국주의다. 그리고 안에서는 지킬 박사 같지만, 밖에서는 하이드 씨 같다.”
제가 미국 안에서 민주주의 정치를 맛보고 지킬 박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를 경험하며 친미주의자가 되었다면, 한국의 학생들은 침략과 전쟁을 일삼는 제국의 실상과 하이드 씨 같은 위정자들의 위선과 오만을 지켜보며 반미주의자가 되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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