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신연령은 20-30대이고 체력은 30-40대이며, 몸뚱이로는 반백인데 머리털로는 온백이다"는 말을 즐겨 쓸 만큼 나이에 비해 머리가 많이 하얀 편입니다.
30대 후반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했지요. 머리가 훌렁 벗겨진 전두환이 1980년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머리 나쁜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쓰면 대머리가 되고,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쓰면 흰머리가 된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제가 마침 박사과정을 밟을 때여서 좋은 머리로 공부를 많이 하다보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노라는 농담도 많이 했습니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저도 조금 긴장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우리말이 서툴러 혹시 왕따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요. 제가 틈틈이 아이 친구들과도 어울리며 축구를 같이 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기더군요. 아이 친구들이 제 흰머리를 보고 아들에게 제가 아빠인지 할아버지인지 물었다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 아빠 엄마는 젊은데 우리 아빠 엄마만 왜 그렇게 나이가 많으냐는 불만도 털어놨습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저는 이미 40을 넘겼거든요. 그러면서 강력한 항의 겸 애처로운 호소를 했습니다. 염색을 하라는 겁니다. 아빠 눈이 나쁜데 염색하면 시력이 더 떨어질 수 있고 한 번 하면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염색하는 게 좋지 않다고 설득해보았습니다만 그래도 해야 된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불만과 스트레스가 꽤 큰 것 같더군요. 그러나 저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리게 보이는 앳된 얼굴 (童顔)을 가진데다 교수라는 직업에 흰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터라 염색을 하기 싫었습니다.
며칠간 궁리하다 꾀를 짜냈습니다. 제 학생 두어 명을 집으로 불렀지요.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놀다 제가 학생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언제부터 흰머리가 나셨어요?”
“교수님 흰머리는 너무 멋있어요.”
“저도 교수님처럼 흰머리가 나면 좋겠어요.”
“택호는 내 흰머리가 너무 싫다고 염색하라고 하는데?”
“어! 택호야, 정말로 그랬어? 야, 아빠 흰머리가 얼마나 멋있니? 형아 친구들도 다 그래. 그리고 염색하면 건강에도 나쁘대.”
다음날부터 아빠에게 염색하라는 큰아들의 항의나 호소는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젊은 아빠’가 되어 달라는 아이의 소원을 풀어주지 못한 대신, 아이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귀엽게 사기를 쳐서 불만을 해소해준 것은 어떻게 평가 받을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