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쉽게 진전되지 않을 것 같다. 작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얼어붙기 시작한 남북관계가 지난 8월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 및 현정은 현대회장의 방북으로 풀릴 기미가 보였지만 9월 초 ‘임진강 참사’로 다시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8월 초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북한에서는 억류하고 있던 두 미국인 기자들을 석방함으로써 북미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클린턴이 ‘민간인’ 자격으로 방북했다고 하지만, 북한과 미국 당국 간의 접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주관하고 있는 클린턴 국무부장관의 남편이기도 하고, 그가 대통령을 지낼 때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참모들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직접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2000년 북미 공동선언의 당사자로서 북미관계 정상화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머지않아 북미관계에 ‘중대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된다.
이와 아울러 북한은 남한에게도 화해의 손짓을 보내기 시작했다. 8월 중순 현정은 현대회장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금강산 및 개성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에 관해 합의했으며, 개성에 억류하고 있던 개성공단 근로자를 석방했다.
남쪽 사람들의 개성공단 출입제한 조치도 해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조문단을 보내고, 조문단은 ‘역도’라 불러온 이명박 대통령도 만났다.
이렇게 북한이 보내오는 화해의 손짓에 남한이 선뜻 화답하지 않거나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임진강 참사’가 일어났다. 북쪽의 댐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임진강으로 방류되는 바람에 임진강 유역에서 야영하던 남쪽 사람 6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전에 아무런 통보 없이 물을 흘려보낸 북쪽 당국에도 책임이 있고, 강 수위가 불어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남쪽 당국에도 잘못이 있지만, 지금의 남쪽 분위기는 북쪽을 비난하는 데 치우쳐있는 것 같다.
북한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한 당국의 잘못과 책임이 크든 작든, 북쪽의 방류에 남쪽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면 북한은 원인 제공자로서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는 게 도리다. 남북 당국 간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는 데다 사전 통보 없는 방류가 지금까지의 관행이라 할지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최소한 유감의 뜻이라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쪽에서는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모면하려는 듯 북쪽의 책임을 부풀려 강조하며 반북여론 조성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통일부장관이 ‘의도적 방류’라고 거듭 강조하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수공 (水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보수 신문들에서는 ‘물폭탄’이란 말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국제협약을 위반했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의 사과나 유감 표명과 관계없이 남한 당국은 자신의 잘못과 책임에 대해 유가족과 국민에게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궁금하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것은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합의된 사항을 이명박 정부가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남한 당국이 먼저 정상 간의 합의까지 무시하거나 어기면서 북한 당국이 남한에 사전 통보 없이 방류하거나 국제협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최근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들의 연이은 서거를 맞아 민주주의 발전과 민족의 화해 및 통일에 대한 그들의 업적을 높이 받들겠다고 공언하면서도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제 2의 ‘임진강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남쪽에 대응 댐을 건설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른바 ‘4대강 사업’으로 온 국토를 파헤치겠다는 마당에 수해 방지를 위한 대형 댐까지 세우겠다는 것은 자원의 낭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통일비용’보다는 ‘분단비용’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고,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을 비추어보면,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안보를 튼튼하게 하며 경제를 살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임진강 참사’와 관련하여 북한을 비난하며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것보다 북한 당국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협상을 벌이는 게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한편, 한반도 주변정세를 살펴보아도 남북관계를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먼저 미국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머지않아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모양이다. 9월 초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보좌관과 성 김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가 남한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제는 그들의 북한 방문만 남은 셈이다. 미국은 형식적으로 6자회담을 원하고 북한은 실질적으로 북미 양자회담을 고집하지만 만남의 형식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외교부 당국자의 말대로 6자회담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양자회담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8월말 실시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 정권이 9월 중순 들어서게 됨으로써 북한과의 대화가 곧 시작될 전망이다. 곧 총리를 맡게 될 하토야마 민주당 대표가 미국에 의존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아시아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해왔기 때문에 북미관계에 크게 종속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북일관계를 진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과 가치관이 다른 나라와도 공존공영을 도모한다”는 개념의 ‘우애 외교’도 내세운 터라 우선 일본인 납치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우는 ‘실용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널리 알려진 대로 ‘비핵, 개방, 3,000’이 핵심이다.
“북핵 폐기에 진전이 있을 경우” 국제사회와 협조하여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생활향상 등 5대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해서 10년 내 북한국민 1인당 소득이 3,000달러 수준의 경제에 이르도록 돕겠다는 구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는) 결심을 보여준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북한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경제협력을 비롯한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여전히 ‘비핵, 개방, 3,000’ 구상을 맴돌고 있는 게 문제다.
이른바 북핵문제는 1990년대 초부터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의 현안이 되어온 것으로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 게다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과 남한의 보수층에서도 인정하듯 남한을 겨냥하기보다는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측면이 큰데, 여전히 핵문제 해결을 남북관계 진전과 연계시키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핵문제가 해결되거나 북한이 그런 결심을 보여주어야 남북관계를 개선시키겠다는 고집에 매달리기 보다는 북핵문제 해결을 앞당기거나 북한이 그런 결심을 보일 수 있도록 남북관계를 먼저 개선해야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가질 수는 없을까?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나 북일관계를 이끌지는 못할지라도, 남한이 미국이나 일본의 대북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반민족적 상황만은 만들지 말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