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퉁 교수로부터 좋지 않은 학점을 받을까봐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지만, 미국식이든 유렵식이든 수업에서 살아남겠다며 다음부터는 숙제도 제 시간에 내고 필기도 잘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대학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공책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책에 몇 자 적어놓거나 밑줄을 그어놓기는 합니다만. 둘째 주 수업에서는 잔뜩 긴장을 하고 열심히 필기하는 체하는데, ‘세 사람과 두 개의 오렌지’라는 갈등을 해결하라는 숙제를 내주며 강의를 끝내더군요.
인구는 많고 자원은 적으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 갈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라는 취지였겠지요.
이 과제를 통해 갈퉁 교수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을 때나 운전할 때나 밥 먹을 때나 잠자리에 누워서나 골똘히 궁리하여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냈습니다. 전제 조건은 세 사람이 모두 오렌지를 원한다는 것이다. 오렌지를 원치 않거나 양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갈등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첫째, 가장 공평한 방법은 세 사람이 2/3씩 나누어 먹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나누기가 쉽지 않고 번거롭다는 게 흠이다. 둘째, 가장 쉬운 방법은 공정하게 2명을 뽑아 하나씩 갖도록 하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힘이 세든 약하든, 누구든지 선택될 수 있도록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 등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탈락된 사람은 불만을 갖기 쉬운 게 흠이다.
셋째, 조금 번거롭지만 나누기 쉬운 방법으로 오렌지 2개를 쥬스나 즙으로 갈아 세 잔으로 나누는 것이다. 넷째, 오렌지 2개를 좀 작은 오렌지 3개로 바꿔 하나씩 갖는 것도 번거롭지만 쉽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다섯째, 오렌지 2개를 사과나 바나나 등 다른 과일 3개로 바꾸거나, 오렌지 2개를 팔아 그 돈을 세 사람이 나누어 갖고 각자 알아서 쓸 수도 있다.
셋째 주, 갈퉁 교수는 수업을 시작하며 이번 주 모든 과제가 형편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딱 한 사람 예외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바로 그 예외일 것이라는 예감이 확신처럼 들었거든요. 학생들에게 일일이 과제를 나누어주면서 “Mr. Lee”를 부르는데 제가 손을 들자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습니다. 믿기 어렵다는 듯 주춤거리다 제 등을 두드리면서 “Excellent (훌륭해)”라고 칭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갈퉁 교수는 제 과제 내용을 소개한 뒤 두 가지 방법을 더 추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오렌지를 아깝지만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해버리자는 뜻이지요. 다른 하나는 오렌지 씨앗을 취하여 오렌지 나무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뒤에는 세 사람뿐만 아니라 세 사람의 가족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오렌지를 실컷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과제를 통해 저는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기가 참 어렵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과정이나 절차가 번거롭고 복잡하여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으니까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값진 교훈을 얻기도 했습니다.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는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쉬운 폭력적 방법을 자제하고 꾹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요, 다른 하나는 폭력적 방법을 제외한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해보는 창의력입니다.
인내와 창의는 적지 않은 고통과 많은 시간을 요구하겠지만,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할 때 치르는 대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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