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미국인들이 '밀러'나 '밀크'를 발음해도 저에게는 앞의 '밀'자만 들려서 골탕을 먹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우리 선조들 역시 1850년대 미국인들을 처음 만나는 순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신변잡기를 늘어놓다 생뚱맞게 돌변하는 꼴이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 역사 한 토막 공부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미국인들로 추정되는 '외이 (外夷: 오랑캐)'나 '양괴자 (洋魁者: 서양악당)'들을 최초로 만난 것은 1852년 12월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공문서는 음력을 따랐으니 양력으로는 1853년 1월이었겠지요. 그 때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 (지금의 부산항) 앞바다에 이양선 (異樣船: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봉화를 올리는 군인이 발견했답니다. 즉시 상부에 보고하여 곧 문정관 (問情官: 출입국관리)들이 배에 올라 이것저것 알아보았는데, 당시 공문서라고 할 수 있는 [日省錄 (일성록)]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는군요.
人形通同古怪 頭髮垂如蝟毛..... 容貌鼻高髥禿 眼晴惑黃惑碧 身體間或刺肉文身.....合爲四十三名 而其中有一女人 年可二十餘 又有一小男 年可四五歲 頭髮白如羊毛.....以言語俱不曉解 以書字 問其國號與漂到事 亦不曉解 使渠操筆請書 則如雲如畵 非篆非諺 全無知得 但指船指身曰 旀里界 旀里界云云.....
(어려운 한자가 몇 개 튀어나와 옥편을 뒤적거려보니 대강 다음과 옮길 수 있겠군요: 사람 생김새가 모두 예스럽고 괴상하다. 두발은 고슴도치 털 같이 서있고..... 용모는 코가 높고 수염이 없으며, 눈은 노랗거나 파랗고, 신체엔 간혹 문신이 새겨져있다..... (선원은) 모두 합해 43명으로 그 가운데는 20살 남짓의 여인이 하나 있고 너덧살 정도의 사내아이도 있는데 머리가 양털처럼 희다..... 언어로는 함께 통할 수 없어 글자로 국적이 어디고 어떻게 표류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지만 역시 알 수 없다. 그들에게 글을 쓰게 해보니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데 한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라 알 만한 게 전혀 없다. 다만 배를 가리키고 자신들을 가리키며 며리계 며리계라고 운운할 뿐이다.)
그 때 조선 관리들이 이상하게 생긴 배에 올라 얼굴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고 온몸엔 원숭이처럼 털이 보송보송 나있는 요괴 같은 인간들을 조사하면서 말이나 글이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선원들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배와 자신들을 가리키며 "며리계"라고 몇 번이나 외쳤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America"라고 외쳤겠지만, 우리 선조들에겐 앞의 '아'는 들리지 않고 뒤의 '메리카'만 들려 이를 한자로 '며리계 (旀里界)'라고 표기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면 영어 발음에서는 악센트가 매우 중요한데, 악센트 앞의 음절은 매우 약하게 소리나거든요. '아메리카'에서는 '메'에 악센트가 있어서 바로 앞의 '아'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이는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1844년 한 중국인이 출판했다는 인문지리책의 일종인 [海國圖志 (해국도지)]에는 미국인이 '彌利堅 (미리견)'으로 표기되어 있다는데, 이는 'American'에서 A가 생략된 '메리칸'의 중국식 발음일테니까요.
요약하면, 1840-50년대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은 '아메리카'나 '아메리칸'의 앞부분을 듣지 못했고, 1983년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저는 '밀러'와 '밀크'의 뒷부분을 듣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주 간단한 단어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면, 동양인들의 귀 보다는 미국인들의 입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듣는이 (聽者)의 청취력뿐만 아니라 말하는이 (話者)의 발음도 문제라는 뜻이지요. 제가 '밀러'와 '밀크'조차 구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격지심으로 조금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만.
* 이 글은 [이재봉의 평화세상] (blog.daum.net/pbpm21)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