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착 후 시차에 적응할 겸 사나흘 푹 쉰 뒤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동포가 운영하는 브루클린 (Brooklyn)의 조그만 잡화점에서 일하는 것이었지요. 학기가 시작되더라도 수업이 없는 날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게 주변 환경이 참 삭막하더군요. 백인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흑인 밀집 지역에서 가게는 1층짜리 조그만 건물 안에 방탄유리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열 걸음만 벗어나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며 주인은 지하철로 다니지 말고 자신의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하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택시도 운전석을 방탄유리로 감싸지 않으면 통행할 엄두를 못 낸다는 험한 동네여서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가게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떼어놓기 어려웠지요.
가게에는 방탄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손님이 바깥쪽에서 물건을 주문하면 안쪽에서 물건을 내주는 식이었습니다. 바깥쪽에서 안쪽의 점원이나 물건에 총을 겨눌 수 없도록 돈과 물건을 교환하는 조그만 창구는 지그재그로 돼 있고요. 손님이 물건을 직접 만지지 못하고 점원을 통해서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물건의 이름과 값을 빨리 외워야 했는데, 술과 담배가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맥주 상표는 너덧 가지 밖에 되지 않아도, 각 상표마다 캔맥주와 병맥주로 나뉘고, 캔은 8온스와 12온스 그리고 16온스, 병은 12온스와 쿼트 (quart) 등의 크기가 있었으니 맥주 종류만 수십 가지인 셈이죠. 둘째, 담배 상표는 열 가지가 넘는 가운데, 각 상표마다 맛과 길이가 달라 이 역시 수십 종류나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저를 가장 헷갈리게 만든 것은 '밀러 (Miller)'라는 맥주와 우유 (milk)였습니다. 밀러나 밀크나 저에겐 앞의 '밀 (mil)'자만 들렸기 때문입니다. 우유는 1/2 파인트 (pint), 파인트, 쿼트, 1/2 갤런, 갤런 등의 5가지 크기가 있었는데 쿼트짜리 밀러와 우유의 발음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12온스나 16온스짜리 "밀-"을 달라면 같은 용량의 우유가 없기 때문에 맥주를 주고, 파인트나 갤런짜리 "밀-"을 요구하면 그 크기의 맥주가 없어 우유를 건네면 됐지만, "쿼로브밀- (quart of mil-)"을 주문하면 맥주인지 우유인지 몰라 어떨 때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어느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영어를 가르쳐줄테니 물건을 공짜로 달라며 빈정거리는 손님도 나타나더군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1학년 때부터 영어 회화책을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3학년 때는 영어 웅변을 하는 등 영어만큼은 인문계 고등학생들 못지않게 공부했노라고 자부했는데 밀러와 밀크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듣기 실력에 엄청난 자괴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