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3년 가을부터 1994년 여름까지 미국에서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도중에 1년 남짓 한국에서 생활한 것을 빼면 30대 10년의 삶을 전부 미국에서 보낸 것이지요. 그리고 2000년부터 10년 동안 해마다 두 번씩 두어 달 동안 미국에 머물렀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찾아 방학 때마다 태평양을 건너는 이른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거죠.
이런 저를 두고 적지 않은 분들이 궁금해 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첫째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왜 미국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느냐는 것이요, 둘째는 미국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서 왜 가족을 거기에 두고 방학 때마다 들어가느냐는 것이지요. 이에 답할 겸 제 미국생활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사회를 부분적으로나마 쉽고 재미있게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 촌놈,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다
1983년 난생 처음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교수는커녕 대학생이 되겠다는 꿈조차 갖지 못했던 촌놈이 미국유학을 떠난 것이죠.
1970년대까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조그만 농촌에서 저희 집은 두어 평쯤 되는 그야말로 코딱지만한 점빵 (店房: 가게)을 열고 있었는데, 그 구멍가게에 아버지가 물건값이나 외상값을 계산하시던 커다란 수판 (數板: 주판)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주판을 뒤집어 썰매 삼아 방에서 미끄럼을 타다 7살 위의 형에게 들켜 몇 대 얻어터졌습니다. 겉으론 호랑이 같으면서도 속으론 정이 넘치던 형은 훌쩍거리는 동생이 짠했던지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주산을 가르쳐 주겠다더군요. 주산에 대한 호기심이나 재미보다는 무서운 형의 호의를 거부할 수 없어 배우기 시작했지요. 주산선수가 되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하고 곧 유단자가 되어 나중엔 서울의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해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1973-74년 4만원 안팎의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지만 직장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게 지금 생각해보면 큰 다행이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웠어도 제가 돈벌이를 하지 않는다고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대학입시학원 기도 (문지기)와 칠판닦이를 거쳐 대학생이 되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미국유학을 준비했습니다. 대학원까지 나와 무슨 학자가 되겠다기보다는 미국에서 적어도 숙식은 제공해줄 수 있다는 호랑이형의 언약에 솔깃해져 '무작정 도미 (渡美)'에 가까운 유학을 꿈꾼 것이죠. 제가 부산으로 전학했을 때 고학으로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저의 보호자 역할까지 했던 그 형은 나중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1973년 교환학생으로 뉴욕에 건너가 주저앉아 돈을 벌고 있었거든요.
1982년 말 대학졸업을 앞두고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수소문해보았습니다. 비행기승무원은 생명수당이 붙어 월급이 많고, 영업사원은 봉급 외에 출장비가 쏠쏠하다고 하더군요. 대한항공 스튜어드직에 도전했다 면접에서 떨어진 뒤, 한국화장품에 입사하여 회계업무를 맡아달라는 높은 사람들의 끈질긴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007가방을 들었습니다. 출장비를 받으면 동료 영업사원들과 여관으로 직행해 전액을 고스톱으로 날려버린 적이 더러 있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미국행 여비와 한 학기 등록금이 마련되어 1983년 여름 뉴욕으로 날아갈 수 있었지요.
* 이 글은 다른 필자들의 글과 함께 [남북평화재단]에서 발송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제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발송자인 재단 사무국 이메일 주소로 격려의 글을 보내주셔서, 사무국 담당자가 일일이 저에게 전달해주더군요. 앞으로 저에게 의견을 주실 분들께서는 바쁜 담당자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제 개인 이메일 주소(pbpm@hanmail.net 또는 pbpm@wku.ac.kr)로 직접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글은 [이재봉의 평화세상] (blog.daum.net/pbpm21)에도 실리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