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사업
평화소식
후 원
활동소식
평화산책
자료실
지역본부
재단소개
  사업의방향
  교육과훈련
  평화의삶실천
  남북의교류와협력
  국내외네트웍구성
  평화에너지봉사단
  평화소식
  주요 南北합의자료
  비핵관련 합의자료
  후원안내
  재정보고&후원소식
  활동 소식
  활동소식
  이달의일정
  남이랑북이랑
  재단 이모저모
  김정희(나의북한방문
  오덕렬(평화이야기)
  김동진(평화이야기)
  변준희(평화이야기)
  박성용 (평화산책)
  이재봉 (평화산책)
  사진자료
  동영상
  평화자료
  관련홈페이지
  보도자료
  경인본부
  충남본부
  인사말
  창립선언문
  조직도
  발기인명단
  로고설명
  찾아오시는길
이재봉 (평화산책)
snpeace
HOME | 평화산책 | 이재봉 (평화산책)

   
  (46) 홀아비가 되다.
  글쓴이 :      날짜 : 10-12-02 16:12     조회 : 4159    


1994년 8월 귀국하여 경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귀국하기 전 몇 군데 대학에 편지를 보내 강사 자리를 알아봤더니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군요.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보따리장수’라고도 불리는 시간강사였지만 강의를 한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밤새워 강의를 준비하면서도 전혀 피곤한 줄 모르고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강의하는 데 들떠있는 초보 시간강사에게 1-2년만 더 해보면 피로도 느끼고 싫증이나 권태감도 맛볼 것이라고 경험담을 들려주는 선배 강사나 교수들이 있었지만 강의하는 게 몹시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참고로, 그 때의 느낌과 생각엔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공부하면서 강의하고 글쓰는 일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욕심이 지나친지 모르겠습니다만 100살까지 꼿꼿하게 서서 강의하고 꼿꼿하게 앉아 글쓰다 죽는 게 저의 가장 큰 꿈이라는 점도 밝히고 싶습니다.

1996년 3월 드디어 교수가 되었습니다. 마누라 등쳐먹고 사는 ‘등처가’ 노릇 1년 반만에 제대로 밥벌이하며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학부형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거든요. 다음해엔 둘째아들도 학생이 되었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말이 서투르고 글도 유치원에 들어가서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오히려 큰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갔습니다만, 인천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살다가 20여년만에 한국에 나온 아내가 여러모로 어려워하더군요. 한국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터에 친정식구나 친척은 물론 가까운 친구도 전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학부모 노릇하기도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에게 과외공부 시키지 않고 버티는 것도 고통스러웠고, 아이들 선생님에게 돈봉투 건네지 않고 견디는 것도 괴로웠겠지요. 결국 1999년 말 폭탄선언을 하더군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친정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정에 조금 얹혀 지내며 돈벌이를 하면 생활비 마련할 수 있고,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면 학비가 전혀 들지 않을테니 경제적으로는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2000년부터 홀아비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 이 글은 [이재봉의 평화세상] (blog.daum.net/pbpm21)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03735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11길 20 CI빌딩 501호
TEL : 02-6261-0615 FAX : 02-6261-0611 Copyright 2007 KOREAPEACE
통일부 허가법인 제 275호 기획재정부 제 2007-256호 공익성 기부금 대상단체
관련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