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평화 사진작가 이시우 씨가 물었다.
"살벌하게 경계를 서는 군인, 철조망,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들이 떠오르죠? 국민 대다수가 비무장지대를 생각할 때 아무 의심 없이 그와 반대되는 개념인 중무장지대를 떠올립니다. '비무장지대는 중무장지대'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이 비무장지대의 문제점뿐 아니라, 50년 넘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생각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남북평화재단(이사장 박형규)은 9월 16일 '평화 사진작가 이시우 선생과 함께 떠나는 통일 여행'을 갔다. 60명의 회원이 참석해 비무장지대와 인근에 있는 북한 노동당사, 삼부연폭포, 승리전망대를 방문했다.
북한에 대한 우리 시각을 반영하는 노동당사 첫 번째로 철원군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를 방문했다. 노동당사는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북한 정부의 건물이다. 노동당사 앞 소개문에는 1946년 초 지역주민의 노력과 돈을 강제로 동원해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되어 있다. 또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이 취조와 고문으로 시체나 반송장이 되어 나온 악명 높은 곳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시우 작가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 작가가 노동당사를 건축할 당시 인근에 살던 사람들을 만나 보니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노동당사를 지을 때 평당원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있었고,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을 취조하거나 고문한 이야기도 확대 해석되었으며, 역사적 검증이 필요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 작가는 노동당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가 북한과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했다. 또 노동당사는 그런 우리 시각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장소라고 했다.
반청, 반당 의식의 중심지였던 삼부연폭포 점심을 먹고 삼부연폭포에 갔다. 높이 20m의 작은 폭포였다. 가물어 수량은 적었지만, 사계절 마르지 않는다는 설명처럼 시원하게 물줄기가 떨어졌다. 평범하게 보이는 폭포에 이시우 작가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시대의 새 화두가 던져진 곳이라고 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저항하고자 새로운 사상을 만들려고 했다. 불교를 수용한 신라는 고유의 불교문화를 만들었다. 금강산은 이런 반당 사상에서 비롯된 불교식 이름이다.
삼부연폭포 인근에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스승 김창흡이 살았다. 김창흡은 반청 의식으로 조선의 성리학을 만들고자 했다. 정선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미학으로 금강산을 조명했다.
삼부연폭포가 바로 금강산 줄기의 출발지다. 정선도 삼부연폭포를 시작으로 금강산을 그렸다. 이시우 작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금강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반청 의식의 영향을 받은 정선의 그림, 반당 정신에서 비롯된 금강산의 작명처럼, 외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금강산에 던질 새로운 화두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남북분단의 상징 철조망의 다른 이야기 승리전망대는 비무장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승리전망대의 좌우로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정전협정 시 철조망은 없었다. 1968년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고,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되자 철조망은 248km의 비무장지대를 감쌌다.
지금은 철조망이 자연스럽게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는 철조망 확대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히 부대의 반발이 심했다. 고성의 한 부대 중대장은 "비무장지대로 나라가 분단된 것도 가슴 아픈데 철조망을 쳐서 못을 박자는 것이냐. 나는 철조망을 칠 수 없어 월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놓고 북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비무장지대를 돌아보며 이시우 작가는 제 나라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몸이 아프면 관심이 온통 아픈 곳에 집중됩니다. 그래서 아픈 곳이 사람의 중심입니다. 비무장지대는 강원도 지역의 아픔일 뿐 아니라 냉전을 해결하지 못한 세계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는 것은 세계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 평화 사진작가 이시우
이시우 작가는 '사진작가' 앞에 '평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평화 사진작가다.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하며 그는 사진을 접고 운동의 현장으로 들어섰다. 당시 현실에서 사진은 사치라는 이유에서였다. 통일 운동을 하던 그는 93년 철원의 비무장지대를 여행하며 다시 사진기를 들었다.
비무장지대를 중무장지대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를 성찰하기 위해서였다. 나무를 나무로, 짐승을 짐승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대인지뢰, 유엔사 등 전쟁으로 상처 난 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2007년 1월, 민간인 출입 통제선 지역과 미군 기지를 사진 촬영하여 군사상 기밀을 탐지, 수집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에게는 '간첩질한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됐지만, 박원순 변호사, 권영길 의원, 문정현 신부 등 사회 인사들은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수감 중인 그에게 제5회 박종철인권상이 수여됐다. 2008년 말,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끝나지 않은 전쟁, 대인지뢰>, <민통선 평화 기행>등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이 있다. 사진과 글에는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그의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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