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와야지, 거긴 우리보다 더 어렵잖아”
북한돕기 성금 ‘단골’ 원공스님
한겨레 강태호 기자
“아직도 차를 타지 않으십니까?” 원공(사진) 스님은 늘 이런 얘기를 듣는다. 그럼 스님은 이렇게 에둘러 말씀하신다. “녹차는 타지. 근데 그건 그냥 마신다네 ….” 도봉산 천축사엔 밥 구멍 외에 출입문까지 막았다 해서 무문관이라 부르는 선방이 있다. 그 혹독하다는 선방에서 원공은 홀로 6년 동안 면벽 참선을 했다. 1979년 문밖으로 나오자 걷기 시작했다. 바퀴 달린 거는 차든 뭐든 안 타고 두 발로 걸었다. ‘기인’이라는 얘길 들으면 당신께선 “난 중답게 살고 있어”라고 말한다.
“원래는 10년 하려고 했지. 그러다 20년이 되고 30년이 됐지.” 30년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하셨기에 사람들은 이젠 차 타고 다니시려나 궁금해했다. “내가 원래 변덕이 심한 사람이야. 이제 이게 편해. 나가서 걷다 보면 시원해. 얻어먹는 근성이라서 그런지. (걷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다니며 쓰레기 줍는데 그게 재미있어.” 스님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길에서 병 하나, 담배꽁초 하나를 주울 때도 숙여야 되니 보잘것없는 쓰레기에게 고개 숙이면서 배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낮엔 살짝 봄 햇살이 비치기도 하는 지난 2일 도봉역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스님의 거처(선각원)를 찾았다.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다. 방엔 나무침대 하나, 한쪽 구석에 배가 불룩한 등산용 배낭이 전부다. 3일부터 한 백일 정도 강원도 쪽으로 길을 떠나신다더니 미리 채비를 한 듯했다. 지난해 가을께 스님께선 어려운 북녘동포들에게 전해주라며 돈을 내놓았다. “만원 보낸 이도 있고 오만원, 십만원도 있어. 예전엔 1년이면 천만원 됐는데 지금은 모두 어려워 3년 걸렸어.” 십시일반이라며 천만원에 십만원 더 보탰다. 영수증에 서명까지 받으시며 꼼꼼히 챙기셨다. 그러고는 “동참한 사람들에게 분명히해야 하니 이름 쓸 건 없고 그냥 북에 보냈다는 거 한 줄 내면 된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1997년 중국에 갔을 때 걸으며 모은 여비를 아껴서 옥수수 100t을 보내기 시작해 돈이 모이면 북의 배고픈 이들에게 보냈다. 예전에도 두 번인가 “한겨레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천여만원을 맡기신 적이 있다. 빈자일등인지라, 정성이 소중하다 보니 달랑 ‘성금 접수’로 하고 싶진 않았다. 좀더 모아 비용 안 들이고 싸게 많이 보내야 할 텐데 궁리하다 시간만 보냈다. 수소문 끝에 남북평화재단이 20일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우유 값에 보태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동안 모은 돈이라며 만원짜리 백장을 또 내놓으신다. “국내에도 어려운 이들이 많은데 …” 하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쪽은 우리보다 더 어렵잖아.”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3424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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