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정원과 경찰 보안수사대의 밥줄 타령 부활해"
"상생화해 정신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정부"
<국보법폐지 연속인터뷰>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박형규 목사
국가보안법(국보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4개월 여 만인 1948년 12월 1일 공포됐다. 그리고 그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른지 벌써 60년이 지나고 있다. 그 세월 동안 국보법은 여전히 극명한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949년의 국회프락치 사건, 1958년의 진보당 사건, 1973년의 최종길 교수 사건, 1975년의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 등 국보법이 만들어 낸 정치적 조작사건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간 국보법 위반사범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송두율 교수 사건, 전교조 통일위원회 김맹규 최화섭 사건, 사진작가 이시우 사건들을 보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보법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보법 제2조의 `반국가단체`라는 표현은 북한을 주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선언서는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국보법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 그리고 통일로 나아가는 현 시점에서 버려야 할 낡은 유물인 것이다. <위클리서울>은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놓고 2007년부터 시리즈로 각계 전문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해오고 있다. 그동안 이시우 사진작가, 동국대 강정구 교수, 박래군 인권운동가, 중앙대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한국외국어대 이장희 교수, 국민대 이광택 교수(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 상지대 홍성태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진중권 중앙대 교수,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김승교 변호사, 한국진보연대 대표 한상렬 목사,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원로 재야 인사 이기형 시인, 김규동 시인, 소설가 남정현 선생, 한국진보연대 오종렬 공동대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전 전국민주화교수협의회 의장), 간디학교 최보경 교사,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 송두율 교수, 진보신당 노회찬 공동대표, 성공회대 김수행 석좌교수, 민언련 박석운 공동대표, 원광대 정치학과 이재봉 교수,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평화재향군인회 표명렬 대표, 법무법인 덕수의 최병모 변호사, 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 동국대 장시기 교수,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 선생, `송환`의 김동원 감독,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민중예술가 신학철 화백,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 연세대 오세철 명예교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이승호 의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한국진보연대 정광훈 상임대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이신철 연구교수, 민중예술가 임옥상 화백, 언론개혁시민연대 신학림 상임집행위원장,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송호창 변호사, 민주당 이영순 최고위원,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 `오송회` 사건의 박정석 선생,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이재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실천연대) 사무국장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이번호엔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와 그 자리를 가졌다. 박 목사는 해방과 6.25 등을 겪으며 우리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해온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전쟁 이후 유신독재를 반대해온 민주화 과정의 투사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이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에 헌신해온 종교계의 거물이기도 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장(198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2001년 11월∼2004년 9월)을 거쳐 현재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임중인 박형규 목사. 이제 그가 살아온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그의 명성에 대한 실례랄까. 그 정도로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박 목사다. 박 목사는 "최근 들어 국정원과 경찰 내 보안수사대의 밥줄 타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명박 정부가 이를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현정권과 관련 "`이건 아닌데`라고 판단하면서도 당장 `아니다, 잘못했다`고 해버리면 권위가 위축되고 창피하니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보수가 어떻게 다시 잡은 권력인데 그 권위를 땅에 내팽개치겠는가. 암담하다"고 얘기했다. 다음은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박형규 목사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젊은 시절 오랜 세월을 일본에서 보냈다고 들었다. ▲ 대학 4학년을 눈앞에 둔 1949년 3월 저는 USIS(미국문화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창녕중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인데, 친구 장상문이 USIS에서 일하자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장상문은 부산대 경제학과를 나온 동기동창으로 외무부에서 고위관리로 일하다가 나중에 불교방송국을 설립한 사람인데, 그는 USIS에서 행정을 담당했고 나는 도서관을 책임지게 되었다. 1950년 3월까지 약 1년 동안 저는 이 곳에서 일했다. 1950년 5월 부산대학 철학과를 중퇴한 지 얼마 안되어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뒤 약 10여 일이 지났을 즈음 USIS 원장이 우리를 불렀다. 맥아더 사령부 심리 작전국 방송국 군속이 되어 VUNC(유엔군 방송)에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원장은 한 달 동안 일하고 오면 모두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한 달이 9년이 될 줄은 몰랐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을 마치고 동경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집으로 돌아온 것이 1959년이었으니 말이다. 애초 어머니의 바람대로 목사가 된 것이다.
- 사령부에 한국 사람도 많았는가. ▲ 맥아더 사령부에 가보니 여러 한국 사람들이 와서 일하고 있었다. 미군정 때 문교부 장관을 한 오천석 씨와 서울대 총장을 했던 장이욱 박사도 와 있었고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일한 김종협 씨, 그리고 북한 함경도의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는 황진남 씨도 함께 일하고 있었다. 황진남 교수는 무려 5개 국어를 한다는 어학의 천재였는데, 부인은 소련으로 가버리고 6.25직전 홀로 남하해 가족이 풍비박산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빌리 유`라고 불리던 유일상 씨도 함께 일했다. 빌리 유 또한 어학에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가 다석 류영모 선생의 큰아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밖에도 방송 작가 김영수씨와 위진록 이라는 아나운서도 함께 일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곳에서 제가 하는 일은 VUNC 한국어 방송을 위해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주로 뉴스를 한국말로 옮겼다. 그러나 일할 사람이 매우 적었으므로 김영수 씨가 방송 드라마를 쓰면 그 드라마에 성우로 출현하기도 했다.
-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 ▲ 동경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아카이와 사카에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신자가 좌익 사상을 가진 동경대 학생들이었다. 예배를 마쳤는데, 학생들을 지도하는 기독교대학의 아베 고조라는 교수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응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해서 해주었더니 학생들 모두가 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남침`이라고 내가 주장해도 남침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아카이와 목사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 `당신이 북쪽에서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이 사람과는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베 고조에게 당신들이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자기가 믿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실을 판단한다고 말했다. 미국 발표를 믿느냐 소련 발표를 믿느냐 선택해야 하는데 자기들은 소련 발표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진실`이 이처럼 달라지는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 박 목사는 당시 전쟁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나. ▲ 주로 전쟁상황을 보도하는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나는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비교적 잘 알 수 있었다. 국군이 계속 패퇴해 낙동강 전선마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참상을 지켜보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서 일하는 한국사람들의 마음은 정상일 수 없었다. 절망하면서 자살한 사람도 나왔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은 부산에 살고 있었지만,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부산이라고 안전할 수 없었다. 영문 뉴스를 번역하면서 우리는 전쟁의 실상과 보도 사이에 거짓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사령부에서는 철수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아 국군이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울중앙방송(지금의 KBS)은 국군이 계속 승승장구한다고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VUNC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전쟁 중에는 전술상, 또는 심리전을 위해서도 보도에 거짓이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진실은 알려야 하는 것이 보도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국군에게 막대한 인명피해가 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스트라이크를 하기로 뜻을 모으고 행동에 들어갔다. 후퇴할 때는 후퇴한다고 정직하게 보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측이 타협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나온 말이 `전략적 후퇴`라는 것이었다. 후퇴라는 말이 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전략적`이라는 말로 그것을 중화시키자는 것이었다. 미군 당국은 치밀했다. 영문 보도자료를 우리가 번역하면 오키나와에 있는 모니터 팀이 모두 듣고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누가 번역했는지를 체크했다. 번역을 잘못하면 그것을 잡아내 질책하고 큰 실수를 저지르거나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책임을 물어 그 사람을 쫓아냈다.
- 전쟁 당시 심정이 어땠나. ▲ 휴전을 조금 앞둔 1953년 늦은 봄, 나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일시 서울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미군이 북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조국 땅, 그 참상을 머리 속으로 그림만 그려보다가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 그 현실을 보니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서울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저는 많이 울었다. 군용 지프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지프차를 운전하던 미군 병사가 미국 사람이 뭐 그렇게 슬프게 우느냐고 물었다. 미 군속도 군복에 US라는 표지를 달고 있었으므로 그는 나를 미국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는 미국 사람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다`고 대답해 주면서 울었다.
- 당시 서울에서 어떤 일을 했나. ▲ 제가 서울에 출장 온 것은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국장 보좌관으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전시하의 서울중앙방송은 사실상 미군 당국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가 연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승만의 이러한 입장은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서울중앙방송은 이러한 데모만은 방송에 내보내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방송을 통제하면서 `북진통일`이란 말만 나오면 방송을 끄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방송책임자인 미군 간부가 한국말을 몰랐으므로 보좌관인 제게 그 임무가 주어져, 이승만 대통령의 여러 담화에서도 `북진통일`이란 말만 나오면 그 부분의 방송을 꺼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는 이승만 정부에 밉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여권 발급을 받지 못해 일본에서 돌아올 수 없었다. 괘씸죄에 찍힌 것이다.
- 폐결핵에 걸려 고생했다고 들었다. ▲ 서울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저는 동경의 사령부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일의 부담이 나를 더욱 짓눌렀다. 장욱 선생을 포함해 나이 많은 분들에게 시키기 어려운 일까지 우리에게 넘어와 몸이나 마음이나 고달픔이 더해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의 폐결핵이 재발되었다. 몸이 점점 쇠약해져 검사를 받으니 결핵이 진행중이라는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폐결핵을 매우 두려워했으므로 저를 급히 미 육군병원에 입원시켰다. 저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있었다. 희망을 가질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동안 애써 치료하여 다 나났다고 믿었던 결핵이 도진 것도 충격이었고 앞으로 치료하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비관론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병원이라는 곳도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이 느껴져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핵환자는 안정이 최우선이다 하여 화장실에 가는 것도 간호사가 휠체어로 데려다 주었고 음식도 너무나 맞지 않아 지겹기 그지없었다. 물론 전쟁의 참화가 제 가슴속에 남긴 상처 또한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어 자신의 미래나 나라의 미래나 희망을 가질 수 없게 했다. 이렇게 병들어 돌아가면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짐만 될 것 같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방마다 철창으로 막혀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미군들도 병실에 갇히면 자살충동을 느끼는 모양인지 방마다 철창으로 막아 놓고 있었다.
- 한국에 돌아온 이후 줄곧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국가보안법과 같은 종류의 법에 많이 걸려들었을 것 같다. ▲ 주로 도시 빈민들을 위해 투쟁해왔다. 노동자, 농민, 빈민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내란예비음모죄`로 잡혀가기도 했다. 잡혀갈 때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둥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 그럴 때 마다 박정희 정권이 제가 함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군정에서 일한 저의 과거 이력 때문이었다. 미국대사관 쪽에서는 늘 불평이 쏟아졌다. 하도 많이 끌려 다녀서 일일이 기억은 다 안 나는데 73년 남산야외음악단 사건이 그러했고 긴급조치 3호, 4호가 발동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0만원씩 내고 금보석으로 석방된 적도 있다. 이런 가운데 인상적인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경우 당시 공안당국은 이를 인혁당 사건과 연결시켜 대구의 한 대학생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예나 지금이나 공안사건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 모조리 조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사건 조작력이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지만 공안당국은 노동자, 농민, 빈민들 살 궁리 모색하는 데에도 북한과 연계시켜 사건을 조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들 관리들이 스스로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공안사건과 관련해, 제 기억에 비추어 보면 형사들은 그나마 좀 인간적이었다. 민중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누굴 잡아들인다 해도 사적으로 간첩으로 모는 경향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정보부는 보다 적극적이었고, 보안사는 최악이었다. 보안사 정도 급으로 올라가면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 `잘못`이라고 알면서도 고문의 수위는 절정에 이른다. 실제 감옥에 가면 간수들 중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상당히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공안사건 대부분이 조작이라는 것 알고 있으면서도 밥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정원과 경찰 내 보안수사대의 밥줄 타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다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북과 대립을 강조하면서 무엇이든 이념적인 잣대로 규정하려 한다.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어서일까. 국보법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범죄에 적용할 수도 없고, `진짜 간첩`을 잡기 위해서라면 형법으로도 충분하다. 언제든지 국민들을 위협할 수 있는 우익정권의 첨병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젊은 시절 저랑 데모해봐서 이런 사실들 잘 알텐데 작금의 사태들을 두고 왜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것인가.
- 이명박 대통령은 교회 장로다. 목사로서 현 정부를 어떻게 바라보나. ▲ 기독교의 잘못된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정신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비교해 한가지 좋은 사례를 들겠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루터 목사는 반민주 세력들로부터 갖은 고문을 당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그 세력들은 동독 공산당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소련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은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그 세력들은 동독공산당에게 붙잡혀 숙청 당하곤 했다. 이때 루터 목사는 이들 세력들에게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오라`고 했다. 이런 게 기독교 정신이다. 이런 모습을 이명박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추종하는 기독교 세력들은 알고나 있는가. 남북 관계도 마찬가지다. 민간 차원에서 우유나 쌀 등을 보내는 것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다. 그걸 주면 북한 주민들에게 안돌아가고 군인들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설령 그렇다고 치자. 그 군인들은 조선 사람 아닌가? 쌀이랑 우유 준다고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을 앞설 일도 없다. 상생화해 정신은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정부다. - 정치적으로는 현 정부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 대통령이 CEO 마인드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게 큰 문제다. 공사판에서 포크레인으로 밀어붙이듯 정치도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현 정부는 `이러다 스스로 무덤 파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문제는 `이건 아닌데`라고 판단하면서도 당장 `아니다, 잘못했다`고 해버리면 권위가 위축되고 창피하니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가 어떻게 다시 잡은 권력인데 그 권위를 땅에 내팽개치겠는가. 암담하다.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기에 접어들었다. ▲ 북을 전복하고자 하는 한국의 극우 세력들이 적은 수가 아니다. 북한을 돕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이 세력들이 힘을 쥐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해 진 것이다. 북한은 늘 고립돼 있다. 사면초가다. 중국 정도가 북을 도와주는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북이 그래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동족간의 교류 때문이다. 민족의식의 발로로서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교포들 또한 많이 돕고 있다. 북한이라는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경제적인 고립상태 때문이라고 본다. 도와주는 국가가 거의 없다. 이런 와중 남한이 북을 돕는 것은 마땅하다. 현재 이를 부정하는 것은 동족을 압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전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도 서독은 동독에 대해 조건 없는 지원을 많이 했다. 독일의 사례에 비추어 대화와 개방을 재계해야 한다. 남북평화재단 또한 그런 의미에서 남북 상호 이해하고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 공안탄압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 이를테면 미네르바 사건을 왜 그런 식으로 몰고 가는지 이해가 안간다. 누구든지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데 말이다. 미네르바가 를 왕창 뒤집어 버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사건이다. 전반적으로 인터넷과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나 통신을 잠재우기는 힘들 것이다. 만약 언론이 진짜 입을 다물게 된다면 국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촛불보다 더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의 생명도 끝이다. 제발 상식이 어긋나지 않는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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