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인 박형규(사진.87) 목사가 길 위에서 신앙을 펼쳐 온 한평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 펴냄)를 내놓았다.
박 목사는 4.19혁명 50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에서 평범한 목회자였던 자신을 교회 밖으로 이끌어낸 계기로 4.19혁명을 꼽았다. 결혼식 주례를 보고 나오던 길에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엉터리 목사로 살아왔다는 것을 거듭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
"들것에 실린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이후 박 목사는 빈민 선교와 인권운동, 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6차례 감옥살이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듬해 기독교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을 배포하기로 했다가 실패했지만, 박 목사는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됐다.
"덮어두었으면 없었던 것으로 잊혔을지 모를 사건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림으로써 오히려 유신체제는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국민이 알게 됐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만 그 진행과 결과는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신다는 것을 그때 체험했다."이후 전두환 정부에서도 박 목사에 대한 박해는 계속됐다. 박 목사는 '서울제일교회를 와해하려는 계략'으로 결국 길거리로 나서야 했고 6년간 노상 예배를 이어가며 '비폭력 민주화 운동'을 실천했다.
고령에도 통일ㆍ평화 운동 참여를 계속하며 남북평화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 목사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목소리를 들려주며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사회적 구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되새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사람의 영혼이 가난과 억눌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못본 체하면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세상의 권력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과 교회를 박해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런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