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문제를 둘러싼 활발한 외교전
최근 들어 한반도문제를 둘러싸고 관련국들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작년 5월, 8월에 이어 9개월 만에 또다시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잇달아 중국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는 동안,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에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만나고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에 앞서 남북한 간에는 일련의 핑퐁식 동문서답이 있었다. 지난 4월 말 북한당국이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지만, 우리 정부는 북측의 태도에 진정성이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대신 5월 8일 이명박 대통령은 베를린 제의를 통해 북한이 핵 포기를 약속하고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해 사과한다면 내년 3월 서울에서 열리는 핵안보 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북한 ‘조평통’ 은 곧바로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우리 측 제의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남북한이 상대 측 제의를 거부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쌍방 정상들은 일본과 중국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펼쳤다. 이 대통령은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남북대화 여건이 우선 조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중·일 정상에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 위원장은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 발전에 기회를 주기 위해 초청” 했다고 밝혔듯이 중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북·중 우의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다.
그런 가운데 5월 16~28일 사이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방한하고, 5월 24일부터 6월 2일까지는 로버트 킹 대북인권대사가 이끄는 ‘식량평가팀’ 이 북한을 방문한다. 이는 2009년 12월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이후 중단됐던 북미 직접대화가 재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350만 명의 북한 주민이 식량위기에 직면했다고 밝힌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식량실사보고서’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분배감시 문제 등을 협의한 뒤 대북 식량지원 재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 결정이 내려진다면 6자회담의 재개에도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남북한과 주변국의 접촉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남북 사이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면서도 우리 측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고, 우리 측도 북측에 우리의 진의를 전달했다고 하면서도 직접 북측 인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결국 남북한 모두 상대 측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진정성 있는 대화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5.24조치
5월 24일은 천안함 사건의 1차 조사결과에 따른 대북 제재조치를 발표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다. 천안함 군사도발 사태와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3부 장관의 후속조치 발표를 통해 취약계층을 제외한 모든 인도적 지원과 남북경협을 중단하는 등 강력한 대북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정부는 이와 같은 대북조치로 지난 1년간 북한의 현금 수입이 약 2억 5000만~3억 달러 정도 감소했으며, 이것은 북한이 그만큼 벌금을 물고 있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 기업이 떠난 빈자리를 중국 기업들이 차지하면서 대북 제재의 효과가 의문시되고 있다. 2010년 북·중 교역액은 사상 최고치인 34억 달러로서 전년보다 30% 증가했으며 올해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뿐만 아니라 5.24조치는 북한 경제의 대(對)중국 종속을 심화시키는 역효과도 낳았다. 특히 라선경제무역지대, 황금평경제지대 공동개발 등으로 중국 자본이 대거 북한으로 유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이 같은 위탁가공 및 교역 중단으로 북한이 경제적 손실을 입기보다도 우리 측 대북 경협기업들이 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다. 남북교역 중단으로 남측의 위탁가공업체와 대북교역업체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남북경협 기업인들이 올해 1월 24일부터 두 달간 자체 조사단을 꾸려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북 경협ㆍ교역 업체 154개 중 78.6%가 5.24조치로 사업이 중단됐고, 그중 12.3%는 현재 사업이 완전히 중단돼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또한 104개 기업이 총 4030억여 원(약 3억 6000만 달러)의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의 모든 현안을 천안함ㆍ연평도 도발사건에 대한 북측의 사과와 연계하고 있다. ‘천안함ㆍ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사과’ 가 없다면 남북대화를 할 수 없다는 ‘원칙’ 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원칙’ 때문에 백두산 화산활동 회의에도 책임 있는 당국자 대신 민간전문가들을 내보냈다. 천안함 사건이 있기 전까지 ‘비핵화’ 없이는 남북대화가 없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었는데 이제는 그 전제조건이 ‘선 비핵화’ 에서 ‘천안함ㆍ연평도 사과’ 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북한을 둘러싸고 활발히 대화를 전개하고 있는 반면, 한국정부는 5.24조치에 발목이 묶여 남북당국 간 대화는 물론 영유아에 대한 지원 이외의 인도적 지원조차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천안함 사태에 대해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며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 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분간 남북대화의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5.24조치는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북한의 행동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선택폭은 제약을 받고 북한은 대내외정세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대화공세 등 대남 압박의 강약을 조절하는 입장에 서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또한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할 기회는 상실되고 대신 국제사회의 관여폭이 점차 넓어져가고 있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5.24조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무기가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곧 5.24조치의 출구다
우리 정부가 5.24조치가 짐만 되고 별다른 실익이 없는데도 이를 견지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정세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북한 조기붕괴론의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의 한미관계가 역대 어느 정부 때보다도 공고하다는 자신감이다.
먼저, 북한의 조기붕괴론은 지금까지도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주지하듯이 조기붕괴론의 발단은 2008년 하반기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다. 건강악화설과 관련하여 심지어 김 위원장의 병세가 2015년을 못 넘길 정도라는 분석(?)도 나왔다. 작년 초 어떤 연구기관에서는 김 위원장의 유고를 전제한 보고서를 발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김 위원장이 열차로 5000㎞가 넘는 장거리 중국방문을 한 것은 그러한 추론과 배치된다고 하겠다.
조기붕괴론의 또 다른 근거는 북한 경제의 악화이다. 절대적인 식량부족으로 북한체제가 오래갈 수 없으며, 따라서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3년간 남북관계 경색에 따른 남한의 직접적인 경제손실은 45억 8734만 달러에 이른다. 이에 반해 북한의 직접적인 손실은 8억 8384만 달러로 남한의 19.3% 수준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결과는 남북 간 경제교류협력 중 상업적 거래만을 대상으로 파악한 것으로 생산유발 및 부가가치유발 효과, 고용 창출 기회 등 간접적 손실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음, 한미관계가 최상의 상태라는 인식이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한미관계는 '전략동맹 관계'로 격상되었고,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취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미국은 한국정부와 '찰떡 공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한미 간의 ‘찰떡 공조'는 최근 미국의 각종 청구서로 돌아오고 있다. 또한 미ㆍ중 협력과 대통령 재선을 고려해야 될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북한문제에 관한 한국의 요구를 무한정 받아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최근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 움직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북핵문제가 전개된 과정을 보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접촉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한국정부가 나서서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풀이 되었다. 현재 우리 정부가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남북대화→북·미 대화→6자회담'의 프로세스를 주장하여 미국과 중국 등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와 같이 남북 비핵화 대화를 맨 앞에 놓은 일이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의 개선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것이 북·미 대화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어떻게 하면 꽉 막혀 있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에게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시켜야 한다는 의지의 유무에 달렸기 때문이다. 의지만 있으면 비핵화 남북회담을 진전시켜 이를 경색국면 돌파의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고 고위당국회담을 열어 북한의 양보에 수반하는 정치적 타결점을 모색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측의 명분과 체면만 손상되는 것이 아닌가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북한 측의 경우 우리의 5.24조치에 맞서 다음날 ‘조평통’의 담화로 8개항의 실행조치를 발표했지만 사실상 이 조치들은 철회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가운데에는 현 정부와의 일체 당국 대화와 접촉 중단, 판문점 적십자 연락사업 완전중지, 남북 사이의 모든 통신연계 단절 등이 들어 있었지만 작년 10월 말 이산가족상봉 및 올해 2월 초 군사실무회담 등을 통해 스스로 이를 파기하였으며, 그로 인해 북한은 이미 체면을 잃어버렸다.
만약 외교ㆍ국방ㆍ통일 3대 분야의 대북조치를 단번에 철회하기 어렵다면, 이를 단계화하여 북측의 태도변화와 6자회담의 진전 등과 맞물려 조정해나가는 출구전략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 측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 선제적으로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활동을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민족사는 국력 면에서나 당위 면에서나 우리가 주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책무는 우리가 회피해서도 안 되고 회피할 수도 없다. 바깥에서 밀려오는 정세변화에 떠밀려 남북대화에 나서기보다는 한반도 평화와 국가의 미래이익을 내다보면서 북한을 리드해나가는 지혜와 유연한 대북정책이 절실하다. 한반도의 긴장 격화는 결국 우리의 역할 축소로 이어진다는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이제 무거운 짐을 조용히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끝)